Connection to the New Conditions

Lee Daehyung (Director, Curating Company Hzone)

문화와 아이덴티티의 차이를 아는가? 문화는 둘 이상이 공유했을 때 가능하고 아이덴티티는 서로 달라야 가능한 개념이다. 현대 미술은 기본적으로 달라야 한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뚜렷한 아이덴티티를 가지고 있어야 하며 동시에 그 차이 속에서 소통할 수 있는 공감을 이끌어 내야 한다. 그래서 현대미술은 문화와 아이덴티티, 공유와 차이, 컨텍스트와 컨텐츠 사이의 접속관계(connection) 속에서 존재할 수 밖에 없다.  문제는 이 접속관계가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이다. 현대미술이란 지극히 난해하고 추상적인 개념 속에 숨어 무엇이 달라야 한다는 것인지 쉽게 답해주지도 않는다. 분명한 사실은 형태, 색, 크기, 주제, 재료 등 피상적인 차이점이 이 접속관계의 핵심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대신 작품 안에서의 미학적 질서를 넘어선, 작품과 작가, 작품과 관객, 작품과 작품이 놓인 문맥 사이의 상호작용(interaction)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그 무엇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접속관계는 컨텐츠(작품)와 문맥(작가, 관객, 환경) 사이의 다양한 컨디션(conditions)을 의미한다.

중요한 것은 누가 먼저 접속관계를 지배하며 다양한 컨디션들을 내편으로 만드는 가이다. 모더니즘 이후 현대미술의 진화를 이끌어온 서구의 이론적 방법론이 지금껏 미술계를 지배할 수 있었던 이유는 서구의 문화와 예술이 양식적, 미학적으로 우수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보일 수 밖에 없는 문맥 즉 접속관계에 대한 이해와 활용을 잘했기 때문이다. 이는 여전히 한국현대미술을 해석하는 도구로 서구의 방법론이 유용하게 적용되고 있는 현실과도 무관하지 않다. 세계라는 컨텍스트 속에 놓인 아시아란 컨텐츠, 아시아란 컨텍스트 속에 놓인 한국이란 컨텐츠, 한국이란 컨텍스트 속의 또 어떤 그 무엇… 이렇듯 컨텍스트와 컨텐츠는 상황문맥에 따라 그 위치를 달리하는 속성을 가졌다.  쉽게 말해 좋은 컨텍스트가 바로 컨텐츠이고 좋은 컨텐츠가 바로 컨텍스트를 가진다는 말이다.

이처럼 ‘접속관계’는 서로 다른 대척점에 놓인 개념이 서로 소통하고 심지어 그 본래의 성격이 바뀌고 진화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한다. 그래서 새로운 컨디션들이 생성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여기서 우리는 컨텐츠가 컨텍스트로, 접속관계가 새로운 컨디션으로 이어지는 공식을 뒤집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아티스트들이 어떤 변화된 환경 속에 놓여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이는 국제적인 미술이론이나 최신의 서구현대미술의 동향에 비추어 파악할 수 있는 그런 성격의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달라진 문화적,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상황을 파악해 얻을 수 있는 그 어떤 것을 의미한다. 이는 저 멀리 서구의 등불에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의 발 밑도 살피고 움직여야 되는 달라진 생존환경을 의미한다.

이 달라진 환경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목표지향이 아닌 지금 현재 어떤 태도로 어떻게 스스로를 정의해야 할까에 대한 행동지향 담론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그래서 필자는 오늘날 달라진 수 많은 환경들의 변화를 이끌어 내고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행동지향형 컨디션 3가지를 뽑아 보았다. 간혹 미술의 주류와는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어 당장은 주목 받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앞으로의 한국 현대 미술이 유행이 아닌 다양성의 옷을 입을 수 있고, 수직구조가 아닌 수평구조로 체질개선 할 수 있는 작은 단초가 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해 본다.

– 헤테로토피아 Heterotopia

지금껏 한국현대미술은 유토피아를 꿈꿔왔다. 저 멀리 서구의 땅 어딘가에는 있지 않을 까란 막연한 동경의 대상. 그러나 존재하지 않는 땅 유토피아. 일렬로 늘어선 가로수와 잘 디자인된 건축물, 깨끗한 거리. 그리고 환하게 웃고 있는 멋진 사람들. 유토피아를 그려보라면 다들 다른 그림을 그리겠지만, 그래도 유토피아는 풍요롭고, 질서정연하고, 깨끗한 그 어떤 곳이다. 이에 반해 헤테로토피아는 서로 다른 이질적인 것들이 혼재되어 있는 공간을 의미한다. 지저분한 것과 숭고한 것의 혼재, 순혈과 혼혈이 수직구조가 아닌 평행구조에서 대등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공간. 그리고 무엇보다 어떤 것들의 조합이 아닌 어떤 것들이 조합되는 액션이 중요해서 그 조합이 하나의 질서 아래 정해지지 않고 수시로 그 중심을 옮겨가는 공간. 그래서 이분법이 더 이상 의미 없어지는 공간. 또한 어떤 것이 절대적으로 우위에 있다는 식의 캐논이 무의미한 공간. 이처럼 헤테로토피아적 공간 안에서는 다양한 접속관계의 실험과 전복이 이루어질 수 있다.

우리는 글로벌리즘이 한국의 정치, 경제, 문화에 다양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상황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국제적”이라는 라벨이 그 어떤 가치보다 우위를 점하게 되는 현실에 익숙하다. 그러나 예술이 국제적 경쟁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나 만의 것이면서 동시에 모두의 것이 될 수 있는 새로운 소유개념’이 글로벌 트렌드보다 더 중요하다.  이는 국제적이라는 것이 ‘외국에서 통한다’는 말이 아닌 ‘외국에는 없는 이질적인 어떤 것’이어서 그들의 관심을 동등한 눈높이에서 받을 수 있다는 문화적 자신감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헤테로토피아적 세계관이다. 현대미술의 이상향을 뉴욕, 런던 등 한 방향으로 미리부터 잡아 놓고 작업을 하는 한 영원히 유토피아에 도달할 수 없다. 이제 유토피아적인 환상에서 벗어나 지금 이 순간 스스로 밟고 있는 이 현실의 공기를 더 깊이 들여 마시고, 자신의 결코 작지 않은 몸뚱아리가 얼마나 다양한 발걸음으로 새로운 ‘길’을 걸어가게 될지를 자각해야 한다.  더 이상 중심과 변두리로 편가르기 하는 순혈주의의 망상에서 벗어나, 다양한 가치가 존중되고 동시에 비판될 수 있는 헤테로토피아적 태도에 한국미술의 경쟁력이 달려 있다.

– SNS (Social Network Service)

글로벌리즘이 일종의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개념이었다면, SNS는 그런 개념이 얼마나 유용하게 새로운 모습으로 소통할 수 있을까의 가능성이자 통로 역할을 하는 일종의 구조이자 네트워크를 의미한다. 미술을 현대인들이 소비하는 미디어로 보았을 때, 그 미디어가 유통되는 소셜 네트워크에 대한 이해와 중요성은 절대 간과할 수 없다. 특히 아직은 주변에 머물러 있는 한국현대미술 작가들에게 있어 소셜 네트워크는 주변인, 경계인의 불리함을 극복할 수 있는 훌륭한 전략이자 플랫폼 역할을 해 낼 수 있다. 여기서 작가들이 기억해야 할 점은 이제 대중은 거대 미디어의 확성기가 떠들어 대는 일 방향 메시지에 동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보다는 ‘나의 취향’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 ‘특정 상품’에 대한 가장 전문가적인 입장을 가진 마니아, 오타쿠, 얼리 어댑터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는 그 만큼 정보의 양이 많아졌기 때문에 무엇이 좋은지에 대한 절대적인 기준보다는 무엇이 ‘나’에게 맞는가에 대한 상대적인 기준이 중요해진 변화된 소비환경을 의미 한다.

소셜 네트워크의 힘은 작은 것이 큰 것을 이길 수 있다는데 있다. 절대 다수를 감동시키지 않더라도 자신의 작품을 알아봐 줄 수 있는 단 한 명의 마니아(평론가, 큐레이터, 딜러, 콜렉터)를 감동시킬 수 있다면 얼마든지 다른 ‘팔로우’들이 생겨날 수 있다. 이는 트렌드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알릴 수 있고, 구석에 있더라도 언제든 중심의 하이라이트를 받을 수 있는 새로운 미디어 환경을 의미한다. 그래서 다수가 좋아하는 것을 떠라 하다간 국제 미술계에서 ‘리더’, ‘트위터’, ‘마니아’ 즉 생산자로서의 힘을 보여주지 못한 채, ‘팔로우어’ 즉 소비자에 머물 확률이 높다.  이제 내가 한국작가라는 사실 보다 어떤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는가 중요하다. 그렇다고 부정적인 의미의 정치적 네트워크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질적인 것, 생각이 다른 것, 생경한 것들이 서로 연결되어 새로운 담론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기회의 공간. 이것이 바로 미술계가 바라봐야 할 소셜 네트워크의 모습이다.

– 지오 에스세틱 GeoAesthetics

현대미술을 하나의 미학적 판단 기준을 가지고 정의할 수 있을까? 런던에서 태어난 작가를 연구하고 그 글을 써왔던 런던 태생의 평론가가 정의하는 한국현대미술은 무엇일까? 미술이론에 있어서도 글로벌리즘이 적용될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시간이 흐를 수록 그 대답은 “No”에 가까워진다는 사실이다. 이는 앞서 이야기한 헤테로토피아, SNS 등 달라진 문화환경과 미디어 시스템과도 무관하지 않다. 이는 한국적인 미학이 그 이전보다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정도로 성숙해졌다는 의미보다 이제야 지역의 미학적 이론에 눈 돌려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측면이 강하다.

그렇다고 지오에스세틱을 한 국가의 역사성을 담아내야 하는 무거운 어떤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한 국가의 문화적 정체성을 표상하려는 부담을 벗어 던져야 한다. 어떤 특정 공간에서 살아온 한 개인의 이야기를 해석하는데 있어 토착의 이론에만 의존해서는 더욱 안 된다. 한국현대 미술과 디자인 그리고 건축을 한자리에서 보여주고자 기획된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한국이란 단어를 자제한 것도 같은 이유다. 문제는 평형상태를 얼마나 잘 유지하는데 있다. 지오에스세틱이 한 작가의 작품세계에 국제적인 경쟁력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글로벌 스텐다드’가 보였던 ‘배타성’이란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 그런 측면에서 지오에스세틱은 글로벌화 되어가고 있는 미술이론의 현지화 정도로 폄하해서도 안된다. 그렇게 바라보기에는 그것이 가지고 있는 대안적 가능성이 너무 크다. 지오에스세틱은 그곳에서 태어나 스스로 다양한 것들을 취사선택해서 진화해 나갈 때 생존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누군가에 의해 정의되는 결과물이 아닌 스스로 만들어갈 수 있는 능동적인 이론적 자신감을 의미한다.

가장 빠르고 역동적인 미디어 환경을 자랑하는 한국, 정치적 경제적 자신감이 넘쳐난 한국, 그러나 여전히 세계 문화 예술계의 변방국 한국… 이러한 모순된 모습의 한국은 앞서 이야기한 3가지 컨디션 (Heterotopia, SNS, GeoAesthetics)과 그것들의 지속적인 변화를 이끌어내고 있는 다양한 접속관계(connection)가 실험적인 형태로 네트워크를 형성할 수 있는 좋은 플랫폼이다. 전시 Korea Tomorrow 2010은 미술, 디자인, 건축 등 경계를 넘어선 창작환경의 변화와 그것들의 다양한 해석을 엿볼 수 있는 기획이다.

전시는 정치, 성, 이데올로기, 자본 등 권력과 금기에 대한 도전을 즐기는 반항아적 “색깔론자들 Red Complex”, 동양과 서양, 과거와 현재, 개인과 집단, 로컬리즘과 글로벌리즘의 경계를 뛰어 넘는 “하이브리드 리얼리티 Hybrid Reality”, 불가능한 풍경, 삐딱하게 뒤틀린 시점, 공간의 반전 등을 보여줄 “기묘한 사진들 Strange Photos”, 재료와 기법 등 형식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실험 “스킨플렉스 SkinFLEX”, 현실의 또 다른 단면을 찾아 나서는 “파생현실 Spin-off Reality”, 이질적인 것들이 만들어 내는 대안적 질서 “헤테로토피아 Heterotopia”, 숨겨진 공간의 의미를 발견하는 “스마트 스페이스 Smart Space”, 마지막으로 환경과 자연을 테마로 구성된 “클럽 모우 Club MOW” 등 8개의 주제 아래 70 여명의 작가의 작품을 보여준다.

이들 작가들의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눈 여겨 볼 점은 작가들이 사용하는 주된 재료가 캔버스, 세라믹, 사진도 아닌 인터넷 미디어라는 사실이다.  이를 통해 작가들은 애초의 생각보다 거대한 담론을 이끌어 낸다.  “세상이 평평하다”는 이론적인 논리가 실제 현실 속에서 ‘평평한 힘의 균형’을 얻기 위해서는 새로운 미디어 환경을 활용할 수 있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이제 시장은 잘 만들어진 물리적인 오브제가 아닌 관객에게 새로운 인터엑션의 경험을 제공할 수 있는 보이지 않는 가치와 스토리를 만들어 내는 작가에게 눈을 돌리고 있다. 그리고 이런 가치와 스토리는 글로벌리즘의 획일화에 함몰되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SNS, RNS 등 새로워진 미디어 네트워크를 통해 스스로 거대해지는 집단지성의 힘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움직임 속에 더 이상 ‘변두리’에 관한 담론은 필요치 않다. 미술 따로, 경제 따로, 정치 따로 식의 범주화를 가지고는 경계를 넘나들며 벌어지고 있는 다양한 움직임을 제대로 담아낼 수 없다. 무엇을 담기 위한 그릇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무엇을 어떻게 담는다는 액션이 중요한 시점이다.  이런 문맥에서 작가들의 행보가 어떤 판단 기준의 질서가 아닌, 그 질서가 만들어 내는 액션에 맞춰질 필요가 있다. 한국현대미술에 대한 어떤 주도적인 철학적, 인문학적 정의definition가 주어지길 기다리지 말고, 지금 당장 세상과 소통하며 그 속에서 스스로의 정의를 순간순간 발견해 나가는 관찰력이 필요하다. 코리아 투머로우는 이 같은 액션을 환영한다.

Korea will take center stage tomorrow.

Collapse of the economic hegemony propagated by new capitalism is reshaping the world’s cultural and arts landscape. The old hierarchical thinking of “one culture is superior and more competitive than another” is now a thing of the past. The change is especially pronounced in the arts circle. The influence of the Western world, which dominated modern arts, is substantially weakening. The criteria of criticism in this new landscape are also diversifying. People are coming to realize that the dichotomy of ‘Western arts and culture equals modernity’ and ‘Oriental is everything that is not modern’ was a wrong prejudice.

Now, dynamic creators of art with a fresh new angle will take center stage – the one with the capability to build up a system to produce market or context. You have to rely on it to become a wizard who can foresee the future without a crystal ball and dominate the poker game table with no ace card in your hand. With the emergence of new media technology such as Web 2.0, Twitter and Facebook, the world has become even smaller. It took a mere three days for the repercussions of the collapse of Lehman Brothers to reach every corner of the world, and it didn’t take more than a few hours for the contentious article describing how Damien Hirst personally put his work on auction at Sotheby’s and earned 200 billion won reached Korea. The world is becoming flatter in the face of quick information flow and the bridging of the information divide. If you simply get excited over this phenomenon, naming it the commoditization of information, or democratization of information, you are missing the point. Local cultures and arts are gradually losing their identity in this flattened world. Culture and arts easily degenerate and get distorted under the assault of capital. In particular, visual arts in Korea, which has just started to burgeon, is all the more susceptible. Recovering former status as an equal partner is an issue that needs to be addressed immediately.

The year 2009 saw an unprecedented active foray of Korean arts, design and architecture into the world stage. Scouters from the U.S., U.K, China, Singapore, Germany, Taiwan and others who flew in to recruit Korean artists, had to compete more fiercely than ever before to get hold of them. Artists including Park SeungMo, Bahk SeonGhi, Jang SeungHyo, Lee Lim, Lee LeeNam, Choo JongWan and Kim A Young received world’s spotlight through their exhibitions in Saatchi Gallery and Phillips de Pury & Company in London. Kim PaikSun, the architect who collaborated with the intangible cultural properties of Jeonju to upgrade Korea’s traditional furniture to world-class luxury, is scheduled to hold an exhibition in Milan. In addition, the world is eyeing Korea as witnessed by the co-work between Ahn JongYuen and the world-renowned architect Mario Botta, to create a public fixture and the loud praise paid by Italian and North European designers on Kwon JaeMin in the 2008 Seoul Design Olympics. Against this backdrop, how should Korea’s modern arts, design and architecture evolve? What kind of differentiated marketing strategy is required to sharpen global competitiveness? How can it manifest itself in an open platform media environment that is bringing the world ever closer together? How should the term “Korean-style” be defined? These deliberations have given birth to “Korea Tomorrow”.

“Korea Tomorrow” is an exhibition where you can witness the capabilities of 62 talents including artists, designers and architects who have started to receive world spotlight. The exhibition will consist of nine rooms inspired by the key words of U.F.O (Unidentified Face Object), Tomorrowscape, Image Collision, Strange Gravity, Between Borders, Stitched Landscape, In-House House Project and HomoARTEX. Convergence of the media, ubiquitous culture and faster travel are enabling real-time access to a wide variety of cultures. How would the rapidly changing society be defined? How should I be defined? These have become everyday questions. Many artists are struggling with how to interpret media, how to put pieces of landscape together, and define their identity. Yet, telling your own story among personal desire, social desire, personal experience and cultural symbols is an elusive task. In particular, creating something Korean in modern arts is very challenging. ‘Modern’ and ‘Korean value’ still come as contradicting words. This is because modern art finds its roots in Western theory, while the word ‘Korean’ immediately evokes traditional images of folk and rural. It is up to us to create opportunities from the seemingly contradicting values. We should not be afraid of being left out and should take the initiative in defining value that goes beyond  the clash of antinomy. In this way, we can create value.

The deliberation on what is the real Korean value, Korean-style dates back a long way. The approach to it had repeated itself over and over in a consistent manner. The effort always focused on spotting the differences vis-a-vis the Western culture, rather than trying to define one on its own. Unfortunately, the focus of the effort shifts to ‘the West’ at the mention of the word ‘culture’ in no time, and seeking for its identity was something in contrast to the Western world, rather than further encouraging healthy debate and introspecting. Cultural inferiority complex and cultural flunkeyism that forced Koreans to compare themselves to the Western world, had haunted Korea for a long time like a shackle that is hard to undo. Because the cultural identity of one nation starts from latent behavior pattern resulting from collective memory, it does not easily lend itself to change. However, now is the time to overcome the confrontation and take various actions for own definition. In November 2010, Korea will host the G20 Summit Meeting. This means that Korea has now become a partner in the international stage. An era has dawned where we can discuss the potential to showcase our dynamic energy through equal communication, innovation and harmony. We should initiate the efforts to define what modern culture is and engage in a wide variety of debates. A new order requires a new leader. And the new leader   will open up a new world.

Korea Tomorrow is a platform where the new order can take root – an open platform that connects different genres, one that bridges Korea with the world. Just as human beings can breathe and run only if the blood is circulated through the veins, value is created through communication. Korea Tomorrow which first and foremost focuses on generating cross-genres synergy and embraces different genres, is grabbing the attention of many. This is because Korea has many new leaders but no new order upon which they can breathe.